[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사랑하는 이의 얼굴은 왜 아름다운가

입력 2024-01-30 18:09   수정 2024-01-31 00:15


이것은 얼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황홀한 이상향이었다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가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사랑의 이야기다. 사랑을 잃은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사랑의 희미해진 기억뿐이다.

나는 인생의 상류인 젊은 날에서 멀리 떠밀려 왔다. 인생의 하류에서 돌아보니, 저 멀리 한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나는 사랑에 도취해 청맹과니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아득한 기억이지만 그랬을 것이다. 사랑을 잃은 자는 사랑으로 빛나던 얼굴을 망각 속에 박제한다. 아, 나는 사랑을 잃었다. 상실의 고통은 오래 남지만 그 얼굴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얼굴은 타자가 출현하는 장소
사르트르는 얼굴을 “영혼이 나타나고 변장하는 장소”라고 한다. 얼굴을 자아가 출몰하는 장소로 발명하는 것은 철학자의 일이다. 레비나스는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뛰어넘어 타자가 나타나는 형식, 우리는 그것을 얼굴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얼굴은 우리의 자아를 집약하면서 동시에 흐트러뜨린다. 그게 얼굴의 변신술이고 연막술이다.

얼굴은 그 무엇과 견줄 수 없는 변신의 천재다. 얼굴은 항상 타자를 향한다. 타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명령한다. 얼굴에서 발화되는 가장 강력한 주문은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우리는 어떤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얼어붙는다. 얼굴의 주문에 걸린 결과다.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첫사랑은 기적처럼 다가온다. 사랑은 먼저 아름다운 얼굴에서 발화한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읽는 경전에서도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노래한다.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사랑은 아름다움을 무서움의 시작으로 겪게 만든다.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하는 얼굴을 어루만지며 애무한다.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그것을 이 세상에 없는 다른 무엇으로 빚는다.
'사랑의 얼굴'이 우둔해 보이는 건
손가락 아래에서 얼굴은 새로 태어나지만 우리는 제 얼굴이 아닌 한 어떤 얼굴도 영구적으로 소유하지 못한다. 얼굴이 타자가 우리 앞에 나타나는 고유한 형식이라면 우리가 어루만진 연인의 얼굴은 사랑이라는 형식으로 빌린다. 우리에게 다가왔던 얼굴은 그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얼굴은 우리 손에서 벗어나 달아난다. 얼굴은 붙잡을 수 없다. 우리가 사랑에 애타는 이유는 사랑이 타자에게 귀속되는 얼굴을 회수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인 탓이다.

우리는 타자를 얼굴로 기억한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란 이미 잊힌 얼굴, 박제된 얼굴이다. 다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얼굴이다. 우리는 얼굴을 품은 채 늙는다. 나는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다가 깜짝 놀란다. 거울에는 낯선 얼굴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슬픈 사실이지만, 나와 마주친 주름과 점과 흑자들로 뒤덮인 늙은 얼굴은 낯설었다.

노인의 얼굴이란 얼굴의 황폐가 아니라 존재의 쇠락이고, 변형이며, 돌이킬 수 없는 소멸의 징후다. 얼굴은 타자에게서 도망가고 어디론가 숨는다.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얼굴들은 다 사라졌다. 얼굴은 사랑의 명령을 망각한 채로 늙는다. 나는 사랑의 가능성을 탕진한 채로 여생을 살아갈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주 분별력을 잃는다. 사랑에 빠진 자는 이성의 마비와 함께 영혼을 앓는다. 사랑에 빠진 자가 얼이 나간 표정을 짓는 것, 얼굴이 우둔해 보이는 것이 그 증거다.

“내가 추악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도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 안다”(김수영, <풍뎅이>). 이성의 판단이 사라진 얼굴은 우둔해 보인다. 우둔함이란 분별의 부재가 아니라 분별력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둔함은 사랑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그 투기 행위에 매몰된 자의 몫이다. 얼굴은 그 벌거벗음으로 제 안의 비밀을 노출한다. 발가벗음은 수치를 낳는다. 얼굴에서 존재의 가난을 느끼고 부끄러움에 빠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린 평생 하나의 얼굴을 빚는다
일제강점기의 한 청년 시인은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윤동주, <참회록>)라고 고백한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에서 벌거벗은 자아의 욕됨을 찾아내고 전율한 청년의 양심은 얼마나 여리고 예민했던가! 얼굴은 풍경이 아니다. 얼굴은 항상 그 이상이다. 얼굴은 다양한 표정과 내밀한 감정을 드러낸다. 존재의 내부성과 외부성이 교차하는 얼굴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사심과 욕구, 비밀들, 그리고 생을 움직이는 윤리성이 번성하는 얼굴은 타인과 나의 다름을 증명하는 형식이고, 내 안의 벌거벗은 존재성 그 자체다.

오, 얼굴이여, 얼굴은 무로부터 솟아난 것, 우연히 내게로 온 것이다. 태초에 신이 우리의 얼굴을 빚었다. 이 피조물에 눈, 코, 입술, 이마, 볼이라고 부르는 것이 집중 배치된다. 얼굴은 감각적 형태를 가진 고유한 판이다. 이것은 평면이 아니다. 철학자 들뢰즈는 얼굴이 흰 벽과 검은 구멍으로 이뤄진 판이라고 말한다. 얼굴은 차이를 가진 고유한 표상이다.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하나의 얼굴을 빚는다. 얼굴의 빚어냄, 그게 인생의 일이다. 얼굴을 보면 그가 살아온 궤적, 자립의 흔적이 나타난다. 누구도 얼굴이 드러내는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얼굴은 살면서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하지만 제 정체성마저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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